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대전으로 이전했지만, 당시 청량리에 있던 과학기술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며 2년간 그곳 에서 생활했다. 1987년부터 1988년, 소위 ‘쌍팔년(雙八年)’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 당시 나는 ‘한국의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를 꿈꾸며 과학기술원에 입학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내가 그를 존경한 이유는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업적이 순수한 일본 학문 토양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유카와 박사를 알게 되면서, 나 역시 비록 노벨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 토종 연구로 세계적인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유카와 박사가 노벨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업적은 두 편의 저술이었다. 하나는 일본 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어로 집필한 대학원 교재였다. 훗날 모두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출발은 철저히 자국 학문 기반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또한 일본 지방의 오사카 대학에서 받았다. 이 점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유카와 박사가 ‘게다짝 박사’로 세계적 학자가 되었다면, 나는 ‘짚신 박사’로 세계적인 연구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입학했다.
첫해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문제는 쌍팔년 가을,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K고-S대로 이어지는 소위 KS 마피아(E씨, L씨 등) 소장파 교수가 내가 속해 있던 실험실을 차지하기 위해 원로 교수이신 이병호 교수님을 축출하고 실험실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나는 박사과정에 무시험으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모진 압력 끝에 결국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석사를 마친 뒤 KIT라는 대학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이 KIT가 과학기술원에 인수·합병되면서 인력 조정이 이루어졌고, 나 같은 ‘빽 없는’ 사람은 해고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부당 해고를 당했다. 모든 희망을 잃은 채, 나는 새로운 꿈을 찾아 결국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를 입시 부정으로 몰아낸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나에 대한 온갖 음해를 퍼뜨렸고, 나는 박사과정에 부적합한 학생으로 낙인찍혔다. 한국에서 기계공학으로 성공하는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특히 카르텔이 강한 구조 속에서 살아남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기계공학을 내려놓고, 미국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면 그들이 탐낸 것은 학문이 아니라 고가의 연구 장비가 모여 있던 실험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기계공학은 나의 적성과 잘 맞았지만, 이 사건은 학문에 대한 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결국 장비가 필요 없는 수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미국 대학에 진학했다. 이렇게 미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클렘슨 대학교 수학과의 종신교수 자리에 오르기까지, 나는 전공도, 나라도 바꿔야 했다. 물론 미국에서 자리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인종차별은 있었지만 학맥에 따른 인간차별은 없었다. 그리고 실험실 장비의 소유권이 학문적 생존을 좌우하지도 않았다.
그 긴 여정 속에서 중학교 미술 선생님께 들었던 한마디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 내가 유화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유화반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모아 무료로 가르쳐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인생은 유화처럼”이라는 말씀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인생은 수채화나 수묵화처럼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화처럼 천천히, 때로는 덧칠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잘못된 부분은 검게 덧칠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련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 기계공학은 이제 검게 덧칠하자. 그리고 새로운 그림을 다시 그리자.” 그렇게 나는 미국으로 향했다.
유화만큼이나 나를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힘은 유도였다. 국민학교 시절 3년 동안 유도를 배웠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낙법(落法)이었다. 뒤로 떨어지는 후방낙법, 옆으로 넘어지는 측방낙법, 앞으로 구르는 전방낙법을 차례로 익힌다. 낙법은 상대의 공격으로 넘어질 때 몸을 보호하는 기술이다.
흥미로운 점은, 실전에서 후방낙법을 하면 상대의 공격이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판정되어 큰 실점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도는 ‘지는 낙법’을 먼저 가르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안전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유도는 이기는 법보다 지는 법을 먼저 가르치는 운동이다. 나는 그 가르침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질 때는 깨끗하게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다시 설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쌍팔년의 청량리를 떠올리면 여러 단어가 스친다. 정신병원, TMO, 588, 버스 안내양... 어둡고 쓸쓸한 풍경이다.
당시 들은 한 일화가 있다. 병원에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 주장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편의상 A, B, C라 하자.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다투었고, 의사들조차 제어하지 못했다. 그러자 병원 도우미가 제안했다. “세 분이 가위바위보로 진짜 예수를 정합시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진짜 재림 예수라면 가위바위보쯤은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결국 응했다. 결과는 A의 승리였다. A는 스스로가 예수임을 더욱 확신하며 병원에 남았고, B와 C는 패배를 인정한 뒤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했다고 한다. 패배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반면 승리한 A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끝까지 재림 예수로 남아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패배가 곧 실패는 아닐 수 있다. 승리가 반드시 성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일화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과학기술원에서의 나의 패배, 즉 퇴출이 인생의 실패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청량리역 TMO는 일요일 저녁이면 복귀하는 장병들로 붐볐다. 가족과 연인과의 이별이 겹쳐 유난히 쓸쓸한 공간이었다. 역 근처에는 성바오로병원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이른바 ‘588’로 불리던 집창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풍경이 일상의 일부처럼 존재했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시대의 단면이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우산을 같이 쓰면 큰 일난다. 소위 관계를 하기로 합의했다는 암묵적 동의로 간주되서 끌려간다. 마치 교통사고 당해서 랙카가 올 때, 명함 받으면 랙카 사용을 동의했다고 하는 것 처럼. 또, 가끔 완력을 쓰는 소위 기둥서방이라는 건장한 남자가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와 거의 납치 수준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하나 원칙이 있었다. 애인 있는 남자는 절대 건들지 않았다. 가끔 과학기술원 동아리 회원들과 서울 시내에 같이 갔다가 청량리로 오는 일이 있는데 전철을 타면 청량리역에 내린 후 버스를 갈아 탄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같이 동행한 동아리 여자 선후배가 애인인척 하면서 출구에서 나와서 버스 탈 때까지 팔짱을 끼워주기도 했다. 소위 남자가 여성에게서 보호를 받은 것이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청량리에서 중랑교를 거쳐 망우리로 가던 버스다. 안내양이 “청량리 중랑교 가요!”라고 외치던 소리가 “차라리 죽는 게 나요”처럼 들린다는 농담이 회자되었다. 종점이 망우리였기에 더욱 그럴듯하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망우리는 공동묘지의 이미지와 겹쳐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TMO도, 588도, 버스 안내양도 사라졌다. 청량리의 풍경은 변했고, 시대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어두운 기억들마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유화처럼 덧칠하며, 유도처럼 지는 법을 배우며, 때로는 패배 속에서 오히려 길을 찾으며 나는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청량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쓰라렸던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원망만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힘을 배웠기 때문이다.
학계의 카르텔과 청량리의 음지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폐쇄성, 내부 논리, 그리고 약자를 밀어내는 구조였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러나 ‘그때’라는 말은 종종 책임을 흐린다. 구조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질서다. 학문 카르텔도, 인사 전횡도, 음지 산업의 방치도 모두 시대가 선택한 결과였다. 나는 그 구조 속에서 상처를 입었지만, 동시에 배웠다. 한 체계가 나를 밀어낼 수는 있어도, 나의 가능성까지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청량리는 내게 좌절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구조를 인식하게 한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보았고, 제도와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나의 미국행은 도피이면서도 저항이었다. 주어진 판 위에서 계속 소모되는 대신, 판을 바꾸기로 한 선택이었다.
지금은 TMO도, 588도, 버스 안내양도 사라졌다. 그러나 구조는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개인의 회고로만 남기고 싶지 않다. 한 시대의 학문 권력 구조와 조직 문화, 그리고 그 속에서 밀려난 한 연구자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패배는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설명되기 쉽다. 그러나 때로는 구조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있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형법 제307조 (명예훼손):
제1항.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항.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310조 (위법성 조각 사유):
형법에서는 공연히 즉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가능성이 있게 사실 또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공공의 이익에 관한 사항에 관하여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되어 무죄가 된다.